본문 바로가기

박성진의 무림통신/박기자의 태권도와 타무도

무사도(武士道)를 상징하는 일본의 검술


[박성진 기자의 태권도 vs. 타무도] 제3편 일본 검술 

                                  ▲ 접근전에서 최강의 무기로 평가되는 일본도.

 
이번에 소개할 무도는 일본의 ‘검술(劍術)’이다. 검도(kendo)가 아니라 검도의 뿌리가 된 고류(古流) 검술을 말한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일본은 칼의 나라다. 그 칼은 ‘무사도(武士道)’를 상징한다. 조선이 ‘붓’으로 상징되는 선비(士)의 나라라고 한다면 일본은 ‘칼’로 상징되는 사무라이(侍)의 나라다.

조선의 ‘선비정신’과 일본의 ‘무사도’가 등가로 치환될 수 있는 개념은 아니지만, 사회 지도계급의 도덕과 정신을 나타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갓을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선비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칼을 차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무라이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조선유학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다양하고 깊이 있는 검술을 만들어냈다.

검술이라는 것은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일본 검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15세기 중반~17세기 초반)를 꼽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이어지는 인물들이 활약했던 바로 그 시기다. 말 그대로 전국시대. 전쟁으로 날이 밝고 졌다.

전쟁이 많으니 싸움 기술, 특히 검술이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터. 당시 일본의 검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음은 ‘명나라의 이순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 조선 정조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은 물론이고 명나라에까지 왜구(倭寇)가 출몰하여 피해가 컸다. 이 왜구의 실체에 대한 연구는 현재도 진행형이지만, 단순한 해적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키가 작은 왜구들은 거의 자신의 키만한 칼(날이 5자, 자루가 1자 5치)을 들고 달려드는데, 한번 맞붙었다하면 명나라 병사건 조선의 병사건 모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장도(長刀)를 가지고 섬광처럼 뛰어들므로 우리 병사들은 겁에 질린다. 왜구는 잘 뛰어드는데 한 발에 일장을 뛴다. 칼의 길이가 5자이니 1장(丈) 5척(尺)을 일거에 나아가는 것이 된다. 우리 병사의 단기(短器)로 대적하기가 어려우며, 장기(長器)를 들면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장도에 마주치면 일도양단(一刀兩斷)되어 버린다. 그것은 무기가 예리할 뿐만 아니라 두 손을 써서 무거운 힘이 가해지기 때문이다."(기효신서)

여기에 일본 검술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다. 가장 예리한 검을 만들어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챙, 챙, 챙, 챙’ 하는 칼 부딪치는 소리가 날 틈이 없다. 칼이 한번 엇갈리면 하나는 서 있지만 다른 하나는 쓰러지는 것이다. 이 왜구들의 검술에 명과 조선의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결국 명과 조선은 이 발달한 일본의 검술을 배운다. (<기효신서>와 <무예도보통지>에는 일본검술인  ‘쌍수도(雙手刀)’, ‘왜검(倭劒)’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연한 것이다. 월등하게 뛰어난 적의 무기와 기술 앞에서 명백하게 뒤지는 우리의 무기, 우리의 싸움방식을 고수한다면 목숨이 붙어나겠는가? 전쟁터에서는 일단 이기고 볼 일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투항한 일본 병사들(降倭)에게 일본의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앞서 지적했지만, 사무라이들은 무사들인 동시에 선비들이었다. 우리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무(武)가 결여되어 있었지만,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무(武)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었다. 검술 수련만 하고 공부하는데 등한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서양의 거대한 흐름이 일본을 압박할 때, 도쿠가와 막부를 지키고자 한 것도 사무라이였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기치로 서구 열강과의 싸움을 주장한 것도 사무라이였으며,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켜 일본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기틀을 만든 것도 사무라이였다.

일본의 검술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후 근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폐도령(廢刀令)’ 이 내려지는 등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1895년 일본무덕회(日本武德會)의 설립 등으로 검술 유파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부 유파의 경우 문화재로까지 지정을 받기도 한다.

일본의 검술에는 한때 수백개의 유파가 있었고 또 걸출한 검호(劍豪)들도 많지만 몇 가지 주요 유파를 소개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 텐신쇼덴 가토리신토류(天眞正傳 香取神道流)
6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가장 오래된 유파로 일본 검술의 뿌리와 같은 검술. 일본 정부에 의해 무형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다른 검술뿐만 아니라 유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지겐류(示現流)
형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실전을 추구하는 검술. 막부 말기 최강의 검객 집단으로 불리던 신선조(新選組, 신센구미)도 지겐류를 만나면 일단 일격은 피하고 봤다는 무시무시한 유파.

@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호쿠신잇토오류)
일본 정통검술의 대명사와 같은 유파. 창시자 치바 슈샤쿠(千葉周作)가 당대 최고의 검객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화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검술로도 더욱 유명한 유파. 신선조(新選組, 신센구미) 대원들 중 상당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끝)

[박성진의 무림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