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판정 공정성을 위해 도입된 전자호구가 생각지도 못한 오류를 일으켜 경기 판정이 한 경기가 아닌 여러 경기에서 뒤엎어진 사실이 추가로 발견됐다. 그것도 종주국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대회라는 점에서 이후 상당한 후폭풍이 예상된다.
지난 13일 경남 고성에서 열린 ‘2011 경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파견 국가대표 최종평가전 남자 핀급(-54kg) 최연호(한국가스공사)와 박지웅(부흥고)과 경기에서 전자호구 시스템 결함이 발견돼 1시간 넘게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3회전 경기가 종료됐다. 전광판에는 양 선수 득점은 0-0으로 표출됐다. 그러나 기술전문위원회 윤웅석 의장이 연장전 돌입 직전, 경기 내용과 달리 결과가 미심쩍다며 기록부에 경기기록 조회를 지시했다.
예상이 맞았다. 최연호의 몸통 기술이 1회전과 2회전 두 차례 컴퓨터 기록상에는 적정 강도 이상으로 기록돼 득점으로 인정됐다. 그런데 최종 점수를 확인할 수 있는 전광판에는 시스템을 읽지 못해 아무런 득점이 인정이 안 됐다. 전자호구 도입 이래 시스템 기록이 전광판이 표출되지 않은 오류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한태권도협회(회장 홍준표, KTA)는 긴급 기술전문위원회를 열고 문제의 경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두 차례에 걸쳐 숙의했다. 20년 이상 대회 운영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도 이런 사례는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에 쌓였다.
결국, 양 팀 대표자를 불러 2-0 상황 2회전 중간부터 재경기를 하기로 합의했다. 대회 진행자나 양 팀 대표자 모두 찜찜한 것은 마찬가지. 당시로써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합의한 결과다.
당시 세계태권도연맹(WTF) 경기부 직원 4명이 현장을 목격했다. 경주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회에 사용될 라저스트 전자호구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서다. 관계자 모두 전자호구에서 전혀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WTF는 현장에서 KTA에 이날 열린 모든 경기의 ‘시스템상의 경기기록’과 ‘전광판 경기결과’를 대조해 분석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KTA는 대회가 끝난 후 경기기록을 모두 분석했다. 이날 치러진 49경기 중 19경기에서 시스템 기록과 경기결과가 ‘불일치’한 결과를 발견됐다. KTA는 즉시 이 결과를 WTF에 보고서로 제출했다.
KTA 김무천 경기부장은 “경기 당일에도 문제가 생겼고, WTF에서도 요청이 있어 자체적으로 경기기록과 결과를 내부적으로 분석했다”며 “결론적으로 49경기 중의 19경기 결과에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고 분석 결과를 설명했다. 입장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자 “현재로서는 어떠한 입장도 표명할 수 없다”며 “세계연맹에 우선 보고했으니 회신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KTA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잘못된 19경기 중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경기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일부 선수단이 이번 대회를 문제 삼아 이의를 제기하면서 ‘재 평가전’을 요구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KTA는 이 점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분위기다.
WTF 측 경기부 관계자는 “일단은 분석 중이다. 어떠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이번 일로 인해 태권도 자체에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없다. 라저스트 측에도 기술 오류에 대해 원인을 문의한 상태다”고 밝혔다.
라저스트는 이번 사안에 대해 모두 실수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김종대 대표는 “모든 것이 사실이다. KTA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내부적으로 분석했는데, 프로그램에 버그(시스템 착오)가 발견됐다”며 “태권도 발전에 기여하고자 개발한 전자호구인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뭐라 할 말이 없다”고 책임을 통감했다.
라저스트는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까지는 ‘3.5버전’을 사용했다. 그러나 WTF 경기규정이 지난해 10월 우즈베키스탄 총회에서 개정돼 올해 1월 말 새로운 규정이 탑재된 ‘4.0버전’ 개발을 완료했다.
4.0버전 전자호구는 지난달 경주에서 열린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 첫선을 보였다. 당시에는 외부로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라저스트가 이번 일로 지난 대회도 분석한 결과 5% 정도 오류가 일어났음을 털어놓았다.
결과적으로 똑같은 제품을 사용한 A대회(경주)와 B대회(고성)에서 모두 오류가 있었지만, 수치는 크게 달랐다.
이 원인에 대해 라저스트 측은 A대회는 경기 시작 전 경기정보 다운로딩 과정을 거친 후 ‘테스트모드’로 양 선수가 한 번씩 번갈아가며 발차기를 차면서 정확하게 득점이 인정되는지를 점검했다.
그러나 B대회는 이 과정이 생략됐다는 것. 공교롭게도 테스트모드를 거치면 오류가 최소화한다는 분석이다. 라저스트 측은 “어찌 되었든 실수는 실수다”라고 시스템 오류를 재차 부인하지 않았다.
라저스트는 WTF로부터 17일 전자호구 시스템에 오류가 있었다는 경기 분석결과를 전해 받았다. 이에 곧바로 버그 원인을 찾아 프로그램을 고쳐 18일 오후 WTF에 정상적으로 수정해 보고했다고 전했다.
김종대 대표는 “이번 문제는 기술력과 별개다. 프로그램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버그를 발견했고, 문제점을 곧바로 바로잡아 WTF에 보고했다”며 “만약 기회가 된다면, KTA에 즉시 알려서 다시 재연 테스트를 했으면 한다. 그러면 예전에 왜 버그가 났는지를 확인시켜줄 수 있다”고 밝혔다.
WTF도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라저스트에서 신 버전을 업그레이드 했다면, 사전에 반드시 검증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미 공인제품이라는 이유로 검증 과정을 생략해 이번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기 때문이다.
전자호구는 심판 판정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도입됐다. 도저히 사람으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판단에 ‘극약처방’을 내린 결과다. 하지만, 전자호구 도입 이후 선수들의 경기력이 퇴보되고, 판정 변별력이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많은 태권도 인이 불신이 가득했다.
라저스트는 40여 일 앞으로 다가온 경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공식 사용된다. 또한, 2012 런던 올림픽에 사용이 확실시되고 있다. 앞으로 WTF가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by 무카스 = 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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