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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의 태권도 세상/태권도人 무술人

태권도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작은거인 정우진 - 하

초창기 도장 운영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는 흥분했다. 인터뷰 내내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힘겨운 미국 정착시절과 도장을 개관하기에 이르기까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흑인 빈민가에서 시작한 태권도장 운영은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견은 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태권도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 부족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 대부분은 ‘태권도’란 무술 자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가라테(공수도)’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알고 있었다. 가라테는 태권도보다 훨씬 앞서 미국과 유럽 등지에 보급이 되었다.

[정우진 회장이 1973년 아이오아주 씨더래피즈에서 처음으로 개관한 정스태권도장의 전경이다.]

그는 “도장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도장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갔는데, 오늘의 점심 스페셜은 무엇이냐고 하더라. 내가 무슨 말은 하느냐고 반문했더니, 그들은 중국음식점이 아니냐고 했다”면서 초창기 태권도장에 관한 해프닝을 들려주었다.

정우진 회장은 결심했다. 도장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간판에 ‘가라테’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 앞에서까지 태권도와 가라테가 혼동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비록 가라테의 명칭을 빌려 관원을 모집했지만 태권도의 정신을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태권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 있으며, 자신에 대한 정신적인 도전이다”고 강조했다.

정우진 회장의 초창기 도장운영은 말 그대로 ‘태권도장’이 아니었다. ‘코리안 스타일 가라테 도장’이었다. 실제 80년대 만 해도 외국에서 태권도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낮았다. 지금도 유럽과 중동 등에서는 태권도가 가라테에 비해 보급률이 적은 편이다. 정 회장을 비롯한 당시 해외 곳곳에 태권도를 보급한 한인 사범들이 있어 지금의 태권도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 회장은 가라테가 아닌 태권도를 미국에 알리기 위해 매일같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이마로 벽돌을 격파하고, 발차기를 보여주며 태권도를 알렸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도장에 방문자가 점차 늘어났다. 

정우진 회장 사무실 벽면에는 정스태권도장의 역사가 한 곳에 정리되어 있다.

또 하나. 미국이라고 텃세가 없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도 타 지역에 가면 텃세가 있다. 미국인들 없겠는가. 흑인들로부터 작은 키의 동양인이 ‘희한한 무술’을 한다는 소문이 주변 동네까지 일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정 회장은 동네 깡패들에게 표적이 되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폭력과 범죄가 난무하는 흑인 빈민가였던 까닭에 도장개관 1년여 동안은 그들과의 힘겨루기가 반복되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도복과 띠. 낡았지만 태권도의 혼이 느껴진다.

이러한 과정은 정 회장 뿐만 아니라 초창기 태권도를 전파하기 위해 해외에 진출한 한인사범들이라면 모두가 겪었던 고충 중 하나다. 그래서 지금 태권도 인들은 초창기 해외 파견 한인사범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에 태권도가 세계화 될 수 있었고, 올림픽에 정식종목에 채택될 수 있었다.


무도로서의 태권도가 미국인들을 바꿨다. 태권도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태권도장.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정 회장은 앞날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뒤늦게 털어놓았다. 그래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바로 태권도가 고유한 무도로서의 정신적인 가치가 높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미국인들을 바꾸기 시작했고, 오늘날 태권도가 미국에서 타 무술에 비해 가장 높은 인기를 갖게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는 “도장의 문을 열고 첫 제자를 맞이한 순간부터 태권도의 정신적인 면과 무도적인 측면을 누누이 강조하고 실천했다”고 말했다. 

태권도 가치를 깨닫는 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그의 도장은 자연스럽게 정신적인 수련장으로 변해갔다. 동시에 수련생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진 소외 계층도 많았다. 또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천적 후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은 태권도를 통해 인연의 끈을 맺은 소중한 제자들이었다.

제자를 안고 있는 정우진 회장

이런 제자들을 보며 그는 “무도 태권도를 통해 자신이 갖고 있던 문제점을 훌훌 털어버리는 여러 제자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무도인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외 여러 태권도인들을 만나 보았다. 그 중 정우진 회장은 그 누구보다 태권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에 들 때까지 오직 태권도 생각 뿐이다. 그래서 많은 태권도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태권도를 통해 얻은 것은 다시 태권도에 환원하겠다던 그다. 이를 위해 그는 소외된 곳을 찾아 뜻을 같이 하는 태권도사범들과 자선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2009/05/22 -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태권도人 무술人] - [태권도人] 태권도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작은거인 정우진 (상)


* 본 내용 중에 일부는 무술전문미디어 무카스미디어(www.mookas.com)에 게재 되었음을 알립니다.

정우진 회장은? 1943년 경상북도 울주군 청량면 개곡리에서 출생, 한양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1971년 미국 이민. 아이오와 주 시더래프즈에 정착해 현재까지 거주하면서 한평생 태권도를 위해 몸을 바치고 있다. 1년 동안의 주유소 펌프맨 생활을 거쳐 1973년 흑인 빈민가에 처음으로 태권도장을 열었으며, 97년에는 뉴 라이프 피트니스 월드를 설립하여 동양인 이민자로서는 이례적으로 헬스클럽 사업에 진출하였다. 이후 미국 중남부전역으로 사업을 확장, 현재 8개 클럽에 2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 베이징에 설립되는 첫 헬스컬럽을 비롯하여 중국 내에 총 12개 클럽 오픈을 계획하고 있다. 이 밖에 Mountain Top Co.을 통해 백화점 및 오피스 빌딩 임대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특히 태권도의 해외 보급하업에 관심을 기울여, 세계 120개국에 영문 태권도 잡지인 ‘태권도타임즈’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미국 콜로라도 주에 태권도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저서로서는 1998년 ‘Free Style Sparring와 2002년 ‘세계가 우리를 기다린다’ 등 2편이 있다.

[By 한혜진의 태권도 세상 이야기]

[태권도와 마샬아츠의 오아시스 - 태마시스 -  l www.taema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