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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태권도의 뿌리는 과연 어디일까? 가라테도 한국 것? 만몽 김산호 화백, 출간 - 태권도 역사 재조명 김산호 화백 출간 태권도가 일본의 가라테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정작 가라테의 뿌리는 우리나라 고유무술인 슈벽치기(수박, 手搏)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태권도 역사 서적이 출판돼 관심을 끌고 있다. 가라테 역시 한국의 무술이라는 내용이다. 도서출판 무카스는 태권도 기원에 관한 역사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만몽 김산호 화백 겸 민족사학자가 쓴 를 최근 출간했다. 저자 김산호 화백은 한국 최초의 SF만화 ‘라이파이’를 만든 장본인으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5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90년대부터는 한국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만주, 시베리아, 몽골 등 전 세계를 돌며 민족사학을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런 와중에 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사는데.. 더보기
검도는 요(撓)경기시대가 있었다 미군정하의 일본은 검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속적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된 요경기(撓競技)라는 것을 만들었다. 당시의 검도와 비교해 보면 다양한 점에서 특색이 있는 경기지만, 이것은 미군정하에 기존 검도정신함양을 부여하지 못하도록 한데에 대해 서양의 펜싱 형식을 흉내 냈던 방식으로 만들었다. 호면은 ‘마스크’라고 하고 ‘면금’의 점이 철망으로 되어 있었고, 면포단은 두꺼운 천포제로 펜싱의 면과 흡사하게 만들었다. 갑은 ‘프로텍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펜싱식으로 서구사회에서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행해진 금속 옷감을 사용해서 서구의 15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쳐 행해진 금속을 옷감에 철 또는 대나무의 세판을 꿰맸던 것으로, 호완의 경우는 ‘글러브’라고 해 검도의 호.. 더보기
무예계, 말로만 하는 우리 정신화(精神化)? 우리는 흔히 국내에 난무하고 있는 모든 무예들이 한국의 모태라거나 한국의 전통무예라고 말한다. 뿐만아니라 그 맥락을 우리 민족문화의 고유한 전통성이니 하고 역사속에서 그 뿌리를 찾고 있다.우리 나라에서 각종 무예가 해방이후 단체들이 조직되고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신체단련과 정신수양, 기술의 연마, 그리고 화랑도정신의 앙양 등으로 수련의 목적을 제시해 오고 있다. 심지어 일본에서 전래된 무도역시 화랑도 정신을 뺀 나머지는 일본의 수련목적과 같을뿐, 일본무도의 수련목적과 화랑도정신이라는 그럴싸한 목적을 제시하고 각종 단체들이 창립되고 지금까지 유지하면서 이어져 온데에 대해 놀라움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짜맞추기식의 무도정책이었음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대체로 오랜 역사를 가진.. 더보기
국내에 최초로 가라테가 유입된 시기는? 국내에 공식적으로 일본의 가라테가 선보인 사료다. 동아일보 1937년 8월 13일자 1면에는 종로에 있던 YMCA(중앙기독청년회) 유도부 도장에서 13일 오후 8시반 일본 동경에 소재한 임명관대학(리츠메이칸대학)의 야마구치 고겐(山口剛玄,1909-1989)을 초청해 가라테의 대의급(大意及) 실제시범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당시 야마구치 고겐(山口剛玄)가 시범보인 가라테 유형은 고주류(剛柔流) 가라테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주류는 1860 년대 후반 히가온나 칸조(東恩納寛量)가 오키나와에서 중국 복건성으로 가 남파 소림권에서 14년동안 중국무술을 수행한 후 그것을 오키나와로 전했다고 한다. 히가온나는 오키나와로 전했다 무술은 후에 "那覇手"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수제자였던 미야기 쵸준(宮城長順)에게 .. 더보기
일본 스모에 진출한 한국인은 누가 있을까? 일본의 전통씨름인 스모에 진출한 한국인은 누가 있을까? 해방이후 기록상 가장 먼저 진출한 사람은 서길량이다. 그는 '고려산'이라는 이름으로 태권도2단, 유도3단을 겸비했었다. 부산출신으로 1969년 1월 도일, 후다고야마 도장문화생으로 입적해 신인선발검정에서 발탁된다. 그 후 '조노구찌(序口)'의 자격을 얻었다. 김해농고출신으로 177cm, 체중 115kg이었다고 한다. 그다음은 강성영이다. 그는 일본에서 '남해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가 진출한 것은 1969년 6월 일본스모협회 초청으로 도일, 스모선수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1971년 7월 '마꾸시다'급으로 중간자리까지 올랐다. 입문후 수백명의 일본 장사를 누르고 '세끼와제'와 '요코즈나(橫綱)'의 자리를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그는 1971.. 더보기
조선통신사가 닭을 훔친 씁쓸한 기록 일본인들은 우리나라를 비하하는 발언이나 글을 자주 남긴다. 그 중에서도 조선통신사가 닭을 훔쳐 서민과 싸움을 하는 조선통신사 그림을 놓고 인터넷까지 말이 많다. 위 그림처럼 일본 경도대학에 있는 통신사 그림사료에는 조선인이 닭을 훔친모습이라고 당당하게 써놓고 있다. 닭을 훔펴서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이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일본의 아이와 함께 놀면서 닭을 함께 쫓아 조선인의 모습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이 그림을 놓고 조선인이 도둑질을 한 것으로 매도하고 있다. 조선통신사와 관련해 후쿠오카번의 당시 기록에는 닭 1천마리를 구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은 통신사가 도쿠가와 쇼군에게 선물로 줄 매의 먹이로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통신사의 접대용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화련한 통신사가.. 더보기
日 정부의 '학교 무도교육 강화' [허건식의 무예보고서 - 일본 2012년 전 학교에 무도교육 필수화 추진] 현대사회구조가 변화하고 있다. 도시화와 산업화, 그리고 핵가족화되면서 우리 사회는 인성교육이라는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 무예계에서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최근 몇 년간 화두가 되고 있다. 일선 무술 도장들이 인성교육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도장지도자들은 정책적인 뒷받침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인 프로그램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인성교육에 무도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동안 일부 연구를 통해 발표됐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정책적 차원에서 무도교육의 필요성 등이 아직은 중요한 소재로 인식되지 못하는 실정이다.'방과후 학교'라는 제도를 두어 활성화를 추진하고는 있.. 더보기
한국에는 검도가 없다 개화기 일본에서 Kendo유입, 90년대 유사단체 증가 혼란 우리나라에서 검도는 근대체육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근대초 개화의 분위기속에 일본에서 유입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개항시기인 1876년에 일본에서 다양한 서구식 혹은 일본식 체육이 유입되었다는 가설속에서 죽도형태의 검도가 이 시기에 무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해방이후 우리나라의 힘으로 단체를 조직한 대한검사회 조직구성이전인 1947년까지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해방이후 한국검도는 일제검도의 유형이 그대로 반영된다. 대한검도회 창립과 더불어 대한체육회에 가맹되게 되고, 그후 학교체육과 군경에서 활성화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1988년 올림픽이후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도장이 급증하게 되었고, 유사검도단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유사단체.. 더보기
사법고시보다 더 어렵다는 검도8단 승단시험 일본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요즘은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인원을 뽑는다고는 해도 가장 어려운 시험으로 사법고시가 꼽힌다.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일본 사법고시의 경우 3% 내외의 합격률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시험이 있다. 바로 검도(劍道, kendo) 8단 승단 시험이다. 검도는 10단까지 있을 수 있지만, 시험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실질적인 최고단은 8단이다. 일본에서 이 검도 8단 승단심사는 매년 두 차례 실시되는데 한 회 심사에 약 700명 이상이 응한다. 46세 이상, 7단 취득 후 일정 기간이 지나야 하는 이 시험의 합격률은 1%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내용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국.. 더보기